1. 디지털 유산 관리, 왜 국가별로 차이가 클까?
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은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주제다. 그러나 관리 방식과 법적 접근은 국가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이는 각국의 법적 전통, 개인정보 보호 인식, 플랫폼 규제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유럽 국가들은 개인정보 보호에 강한 법적 전통을 가지고 있어, 사망자의 디지털 자산 처리에도 프라이버시 보호 원칙을 적극 반영한다. 반면 미국은 계약법 중심의 접근을 택해, 서비스 제공자의 약관이 우선 적용되는 경향이 있다. 아시아 국가들은 아직 디지털 유산 관련 법제화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어 플랫폼 정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플랫폼 기업의 국적과 본사 위치에 따라 적용되는 법률도 달라진다. 글로벌 플랫폼(구글, 메타, 애플 등)은 본사가 위치한 국가의 법률을 기준으로 사후 계정 관리 정책을 설계하기 때문에, 같은 서비스라도 국가별 이용자의 경험이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디지털 유산은 국경을 초월하는 특성을 지니면서도 법적·사회적 처리는 국가별로 분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국제적 논의와 협력이 필요한 분야로 떠오르고 있다.
2. 유럽: 개인정보 보호와 유족 권리의 균형 추구
**유럽연합(EU)**는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세계적 선도권을 지니고 있다.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은 사망자의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명시적 규정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회원국들이 자율적으로 관련 법을 마련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프랑스, 독일, 덴마크 등은 사망자 디지털 유산에 대한 별도 입법을 추진하거나 시행 중이다.
프랑스의 경우 2016년부터 '디지털 공화국법'을 통해 사용자가 사망 전 자신의 디지털 자산 처리 방침을 명확히 설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용자는 생전 플랫폼에 데이터 처리 방침(삭제, 유지, 유족에게 전달 여부)을 등록할 수 있으며, 유족은 이에 따라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독일 연방대법원은 2018년 페이스북 사망자 계정 접근 사건에서 유족의 접근권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디지털 자산도 물리적 자산과 마찬가지로 상속 대상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며, 이는 유럽 내 중요한 판례로 자리 잡았다.
또한 덴마크에서는 사망자의 디지털 자산 관리가 유족과 행정기관 협력 하에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편이다. 이메일 서비스, SNS, 클라우드 서비스의 데이터는 법적 절차를 통해 유족에게 인계되거나 삭제된다.
유럽의 디지털 유산 정책은 프라이버시 보호와 유족의 권리 사이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고인의 의사가 최우선으로 고려되며, 가족이 법적 절차를 통해 정당한 범위 내에서 접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가 마련되고 있다.
3. 미국: 계약 우선주의와 RUFADAA의 영향
미국은 유럽과 달리 계약 우선주의 원칙이 강하게 적용된다. 사용자가 서비스 가입 시 동의한 약관이 사망 이후에도 우선 적용되며, 유족의 상속권보다 서비스 약관이 상위 규범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법적 대응이 바로 **RUFADAA(Revised Uniform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다. RUFADAA는 현재 미국 대부분의 주(州)에서 채택되어 시행 중이다. 이 법은 사용자가 서비스 제공자(플랫폼)에 사후 계정 처리에 대한 의사를 명시한 경우(예: 구글 Inactive Account Manager 설정), 해당 의사가 법적 유효성을 가지도록 보장한다.
즉, 플랫폼의 사후 계정 관리 기능을 통해 고인의 의사가 반영되면, 유족의 일반적인 상속권보다 그 의사가 우선 적용된다. 반대로 사용자가 사전 의사를 명시하지 않은 경우에는 법정 대리인(유언 집행자 등)이 법적 절차를 통해 계정 접근을 요청할 수 있다.
RUFADAA는 디지털 자산의 법적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플랫폼 약관에 의존하는 한계도 여전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의 경우 추모 계정으로 전환은 가능하지만, 유족이 고인의 메시지 기록이나 데이터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은 디지털 유산 관리에서 개인의 계약 자유와 플랫폼의 사업 자유를 강조하는 반면, 유럽보다 프라이버시 보호에 대한 법적 장치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따라서 개인이 적극적으로 사전 설정과 법적 준비를 해야 디지털 자산이 원활히 관리될 수 있다.

4. 일본 및 아시아 국가: 초기 단계에서 법제화 논의 진행 중
일본은 최근 몇 년간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디지털 유산 관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암호화폐와 디지털 콘텐츠 상속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법조계와 정부 차원에서 다양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일본 민법은 기본적으로 상속재산에 디지털 자산도 포함된다고 해석하지만, 플랫폼 정책과 실제 상속 절차 사이에 괴리가 크다. 이에 따라 변호사 단체들은 디지털 유산 상속을 위한 별도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있으며, 정부도 디지털 유산 관련 법제화 검토를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자율적으로 사망자 계정 처리 정책을 마련하고 있으며, 유족이 정식 상속인임을 증명하면 암호화폐 인출이 가능하도록 절차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SNS, 이메일, 클라우드 서비스는 여전히 플랫폼 약관에 따라 처리되므로 유족이 직접 관리하기 어렵다.
한국, 중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의 경우 디지털 자산 상속에 대한 명확한 법적 규정이 없고, 민법과 개인정보 보호법 해석에 따라 유족의 권리가 제한되거나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
중국은 최근 **개인정보 보호법(PIPL)**을 시행하면서 디지털 자산의 사후 관리 문제도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법적 기준이 구체화되지 않았다. 싱가포르는 디지털 유산 관리 가이드라인을 마련 중이며, 유언장 작성 시 디지털 자산을 명시할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아시아는 전반적으로 법제화 초기 단계로, 유럽·미국에 비해 디지털 유산 관리 인식과 제도화 수준이 낮다. 이에 따라 개인 차원의 대비가 더욱 중요하며, 플랫폼 사후 설정 기능 활용과 유언장 명시가 필수적인 대응 전략으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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