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유럽에서 디지털 유산 논의가 활발한 이유
유럽에서는 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에 대한 논의가 비교적 일찍부터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이는 유럽이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개인정보 보호 법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의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은 생전뿐 아니라 사후에도 개인정보 보호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규범적 흐름을 만들어냈다.
또한 유럽은 인구 고령화 속도가 빠르며, 디지털 기술 도입이 보편화된 사회 구조를 갖고 있다. 노년층의 디지털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사망 후 남겨지는 디지털 자산과 개인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법적·사회적 논의도 자연스럽게 확산되었다.
유럽에서는 디지털 유산을 단순히 경제적 자산으로만 보지 않고, 개인의 인격·기억·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한다. 가족 간 정서적 유산으로서 디지털 자산의 보호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유족의 접근 권한과 고인의 프라이버시 보호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법적 배경 덕분에 유럽은 디지털 유산 관리 및 보호에 있어 국제적 선도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다음 문단부터 구체적인 법적 장치와 국가별 사례를 살펴보자.
2. GDPR과 유럽 각국의 디지털 유산 보호 법제
GDPR 자체는 명시적으로 사망자의 데이터 처리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GDPR 제1조는 "자연인(person)의 개인정보 보호"를 규정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회원국 법에서는 자연인은 사망과 함께 법적 주체성을 상실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DPR은 회원국별로 사망자 데이터 처리에 관한 추가 입법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에 따라 유럽 각국은 자체적으로 디지털 유산 보호 법제를 마련하고 있다:
프랑스
프랑스는 2016년 '디지털 공화국법(La Loi pour une République Numérique)'을 제정해 사망자의 디지털 자산 관리에 대한 개인적 의사 등록 제도를 도입했다. 사용자는 생전 온라인 서비스 제공자에게 데이터 처리 방침(유지, 삭제, 유족에게 이전 여부)을 등록할 수 있으며, 유족은 고인의 의사에 근거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해당 법에 따라 고인의 사망 후에도 가족이 고인의 디지털 자산 보호 및 관리 권한을 확보할 수 있다.
독일
독일에서는 2018년 연방대법원(BGH) 판례(페이스북 사건)를 통해 디지털 유산 상속권을 명확히 인정했다. 부모가 사망한 자녀의 페이스북 계정 접근권을 요청한 사건에서, 법원은 "디지털 자산도 물리적 자산과 마찬가지로 상속 대상"이라고 판단했다. 이 판례 이후 독일에서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적 상속권 보장이 명확한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덴마크,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
북유럽 국가들은 디지털 유산을 정서적 유산으로 보는 문화적 특성이 강해, 가족의 접근 권한과 데이터 보호 간 사회적 합의가 비교적 잘 이루어져 있다. 덴마크에서는 유족이 이메일, 클라우드 저장소, SNS 데이터에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명확한 행정 절차가 마련되어 있다.
영국
영국은 GDPR 적용을 유지하면서도 자국 내 개인정보 보호법(UK GDPR)과 상속법을 통해 디지털 자산 보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암호화폐 등 경제적 가치가 있는 디지털 자산은 법정 상속 재산으로 인정되며, SNS나 클라우드 데이터는 개별 서비스 약관과 유언장에 따른 처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유럽에서는 각국이 GDPR의 기본 틀 아래에서 고인의 프라이버시 보호, 유족 권리 보장, 상속법과의 정합성 확보를 목표로 디지털 유산 법제를 적극 개발하고 있다.
3. 플랫폼과 이용자의 권리 조율: 유럽에서 이루어지는 실무적 절충
유럽에서는 법적 규범 외에도 플랫폼 사업자와 이용자 간 실무적 절충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GDPR의 영향으로 유럽 내 플랫폼 기업들은 사후 계정 관리 기능을 보다 강화하고 투명하게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구글
구글은 Inactive Account Manager 기능을 통해 사용자가 일정 기간 비활성 상태가 지속되면 데이터가 어떻게 처리될지 사전 설정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유럽에서는 이 기능 사용률이 높은 편이며, 유족의 법적 권리 행사 시 해당 설정 여부가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된다.
메타(페이스북)
페이스북은 유럽 이용자에게 사망 시 계정을 추모 계정으로 전환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며, 고인의 유족이 법적 서류를 제출할 경우 절차를 신속하게 처리한다. GDPR의 영향으로 유럽 지역에서는 이러한 절차의 투명성과 사용자 친화성을 높이는 개선이 지속되고 있다.
애플
애플도 Legacy Contact(디지털 유산 담당자) 기능을 도입해 유럽 지역 사용자들이 사전 설정을 통해 가족에게 디지털 자산을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또한 유럽에서는 플랫폼 사업자와 유족 지원 단체가 협력하는 사례도 많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일부 NGO가 유족을 위한 디지털 유산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며, 법적 절차 안내부터 감정적 지원까지 종합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이러한 실무적 절충 노력은 유럽에서 디지털 유산 보호가 사회적 합의와 실천의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4. 유럽 사례가 주는 시사점과 앞으로의 과제
유럽 사례는 디지털 유산 보호의 방향성을 전 세계에 제시하는 모범적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 고인의 프라이버시 보호와 유족의 권리 보장 간 균형을 지향
- 생전 본인의 의사 반영을 최우선으로 고려
- 법정 상속 재산으로서 디지털 자산을 적극 인정
- 플랫폼 투명성과 사용자 친화적 사후 계정 관리 기능 확대
- 사회적 지원 체계 구축(유족 지원 단체와의 협력)
그러나 유럽에서도 여전히 과제는 남아 있다. 국경을 초월하는 글로벌 플랫폼에서 국가별 법 적용 충돌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암호화폐·NFT·메타버스 자산 등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자산에 대한 법적 해석이 아직 일관되지 않다.
또한 AI 기반 콘텐츠(딥페이크, AI로 생성된 고인 목소리·영상 등)의 사후 관리 문제도 점차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디지털 유산이 기존 법제 안에서 어떻게 보호받고 관리될 것인지는 앞으로 유럽이 풀어야 할 주요 과제 중 하나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유럽 사례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법제화 초기 단계에서부터 고인의 인격권 보호 원칙과 유족의 정당한 상속·관리 권리를 조화롭게 반영하는 법적 체계를 설계한다면, 미래의 복잡한 디지털 유산 관리 환경에서도 사회적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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